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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궁궐산책서점 직원의 책갈피 2021. 10. 11. 15:01
봄부터 궁궐산책을 가고 싶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었는데 늦여름인 이제서야 궁궐에 방문했다. 궁궐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담아내면서도 궁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매우, 매우 재밌게! 전달해주는 책이었다.(댄스댄스 레볼루션, 성격 나쁜 백송, k-돌의 매력, 초심자도 마니아도 궁며드는 과 같은 챕터 제목들이 너무 웃겼다) 이 책을 읽으면 궁궐산책을 안 갈 수가 없을 것 같다.
궁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왕이 어떻고, 처마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다양한 주제들을 어우르고 있어 좋았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궁궐의 돌, 나무, 궁궐 내 고궁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옛 사람들의 물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닥의 돌 ‘박석’,궁궐 전각의 받침대 ‘월대’, 얼음이 쪼개진 무늬 라는 뜻을 가진 장식인 빙렬 무늬 장식벽, 중국 대륙의 거대한 산을 닮은 ‘괴석’, 귀여운 돌 짐슬들까지! 궁궐에서 볼 수 있는 돌들에 대한 이야기가 꽤나 흥미로워서 나도 다음엔 위가 아닌 아래를 보며 산책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궁궐 산책을 가서 눈여겨볼 포인트들을 가볍게 잘 알려주고 있어서, 다음 산책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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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궁궐에 가면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기와와 처마, 화려한 단청과 꽃살무늬 창을 눈과 카메라에 주로 담는다. 이런 요소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나는 자꾸만 위로 향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서, 주인공의 뒤를 받쳐주는 조력자처럼 궁의 모든 요소를 받치고 있는 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다. … ‘주인공 같은 건 안 되어도 괜찮다’는 듯한 태도가 어린 마음에 멋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묵묵히 우직함을 쌓아 왔을 석장이 궁궐 곳곳에서 해맑게 웃는 돌짐승을 조각했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려 온다.
-화강암 다루기의 어려움은 또 있다. 워낙 밀도가 높고 무겁다 보니 길게 팔을 뻗은 모양이나 손가락을 우아하게 펼친 모양을 조각하면 그 부분이 금방 떨어져 버린다. 이 때문에 사람이든 동물이든 웬만하면 몸통에 사지를 착 붙이고 있는 자세를 조각하는 것이 유리하다. 우리나라 석불들을 보면 대개가 둥그런 인상에 팔과 다리를 몸에 붙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과거에는 종이와 풀, 식물성 기름을 이용해 실내 인테리어를 마감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도 식물과 나무는 알뜰하게 활용되었다. … 벽에 바로 붙이는 초배지의 경우 새로 만들어진 깨끗해진 종이를 사용할 때도 있었지만 가장 안쪽에 들어가는 면이다 보니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낙폭지를 쓰기도 했다. 낙폭지는 과거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의 답안지다.
-세종을 포함해 조선 초기의 왕들은 유교적인 라이프스타일에 걸맞은 수종을 더 선호했다.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살구나무나 감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를 심거나 궁궐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정승을 상징한다는 회화나무를 심었다. … 어쨌든 이렇게 궁궐의 진달래는 꽃전과 차에, 심지어 술을 빚는 데에까지도 알뜰하게 활용되었다. … 주변의 웬만한 생물들을 어떻게든 먹을 것으로 만들어 즐기는 먹보 유전가 역시 유구한 세월에 걸쳐 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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