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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_무지개 산으로 가는 길여행기록 2021. 10. 11. 19:22
무지개 산으로 알려진 비니쿤카 트레킹을 위해 새벽부터 짐을 챙겨 나왔다. 비니쿤카는 해발 5,000m에 위치한 산으로, 원래는 눈으로 쌓여있었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눈이 녹으면서 다양한 광물질과 섞여 무지개 같은 다양한 색을 띄게 된 신기한 산이다. 남미 여행에서 경험한 고도들 중 가장 높은 고도여서 가기 전에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평소의 건강과 체력과는 관계없이 고산병이 오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다던데 나는 불행히도 오는 사람 쪽이었다. 그냥 쿠스코에서 가만히 걷기만 해도 앞뒤로 누군가 눌러오는 느낌에 어질했기에 해발 5,000m를 오른다는 것이 조금은 겁이 났다. 게다가 먼저 다녀온 친구, 그리고 블로그의 후기들도 모두 최고로 힘들다, 가다가 힘들어 산소마스크를 쓰고 내려오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대니 더 무서웠던 것도 있다.
남미의 초겨울 날씨에 대해 온도가 몇 도인지 정도만 알아보고 갔던 터라, 내가 추위를 많이 탄다는 점을 간과하고 꽤나 얇게 옷을 챙겨갔었다. 아마 남미에서 가장 추웠던 때는 비니쿤카 등산을 하기 시작했던 때일 것이다. 한국 한겨울 날씨에 기모 후드만 입고 등산하겠다고 나간 것같은 느낌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생각도 못 했을 일이다. 새벽부터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 비니쿤카 트레킹 입구에 내렸을 때 세상에서 추운게 제일 싫은 나는 그 추위로 인해서 이 트레킹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그런 다양한 두려움을 안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그리고 트레킹을 시작한 후, 내가 진리라고 믿는 그 말이 맞다는 근거를 하나 더 수집한 기분이었다. '직접 경험해보기 전엔 모른다'. 항상 이 말을 기억하면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또한 내가 직접 경험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기에 두려워도 도전해보자는 생각을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결국 성격상 억지로라도 도전을 해보긴 해도 그 두려움을 아무것도 아닌듯이 쿨하게 넘기는 단계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결국 이겨내고, 해냈다는 데이터들이 지금처럼 차근차근 쌓이다 보면 점점 쉬워지지 않을까.
중간 지점부터 말을 타서 그런지 트레킹은 내 생각보단 어렵지 않았다. 지치긴 했지만 겁을 너무, 너무 먹어서 그런지 별로 안 힘들었고 심지어 쿠스코에서 날 짓누르던 고산병은 이상하게도 사라진듯 했다. 더 높은 고도에 올라왔는데 오히려 괜찮아지다니 모를 일이다.. 오르는 동안 콜드 플레이의 paradise라는 음악을 들었는데, 이 웅장한 풍경과 정말 잘 어울려서 아직도 그 노래를 들으면 풍경이 떠오른다. 오히려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보기 힘들었던 무지개산보다 오르면서 봤던 이 설산의 풍경이 더 좋았다.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눈물이 났던 적은 처음이었다. 자연의 무한함과 끝이 없는 막연함에 감동했다. 비니쿤카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무지개 산에 올라 알파카들과 사진을 찍고 금방 내려왔다.
왼쪽은 알록달록하고 오른쪽은 눈이 쌓여있는 풍경을 보면서 지구 온난화가 아니었다면 이 곳이 이렇게 관광지가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이 풍경을 못 보더라도 무지개산에 쌓였었던 눈이 녹지 않았더라면, 지구 온난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이라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관광하러 온 당사자가 할 생각을 아닌 것 같지만..
하산하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그런데 하산하면서 옆을 자꾸 지나가는 말들을 보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여기까지 쉽게 올라온 것은 백퍼센트 중간에 말을 탔기 때문이다. 남미에 오기 전까지는 탈 것으로서의 말을 사극에서만 보거나, 대학교 운동 교양 과목에 승마가 있다더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실제로 타 볼 일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말을 '탈 것의 수단'으로 보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말들이 바로 내 옆에서 힘들어하면서 관광객들을 태워 나르는 것을 실제로 보니 너무 힘들어보여 안타까웠다. 물론 말은 인류사에 있어 정말 오래전부터 물건을 나르는 데 쓰여왔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의 노고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아닐까 반성했다. 역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느끼지 못 하는 것들이 많아 더 많은 경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산하고,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었다. 실제로 우리 팀의 어떤 분도 너무 힘들어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가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오셨다. 너무 쉽게 생각할 것만은 아닌 듯했다.
무지개산 트레킹은 사실 남미여행에서 별로 기대가 되지 않았던 액티비티 중 하나였는데, 기대보다 훌륭했던 풍경과 더불어 이런저런 생각해 볼 거리들, 그리고 두려웠던 도전을 해냄으로써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다 해낼 것 같다는 자신감(난 나만 이런 자신감을 얻은 줄 알았는데 이후 남미여행을 갔던 내 친구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해서 신기했다. 역시 사람사는 거 다 똑같구나.)을 얻고 와서 가장 잔상처럼 남게된 경험이었다. 종종 떨리는 일이 있을 땐 이 때 했던 생각, 솟아오르던 그 자신감을 생각한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자신감을 채워주는 기억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이 앞으로 더,더 많이 생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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